가끔 지하철 창에 비친 내 모습이 그럴 싸 해 보일 때가 있다. 물론5-6년에 한번 정도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지만 말이다. 왁스를 바르지 않은 머리가 지하철에서 부는 바람으로 적당히 자연스럽게 오른쪽 눈썹의 2/3 정도를 가린 채 머물러 있고 3일동안 속이 안 좋은 탓에 음식을 제대로 못 먹었더니 얼굴 살이 한껏 빠져서 오랜만에 발라드 가수의 턱 선이 드러나 있는 날. 간만에 나이 답지 않게 챙겨 신은 지난 주 명동에서 새로 산 아디다스 오리지널 스니커즈와 짙은 색의 리바이스 엔지니어드 진이 어울려 보이고 노트북과 소설책 한 권만 덩그러니 들어있는 가벼운 베낭까지 메고있는 내 모습, 정확히는 지하철 창에 비친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일 때 말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은 역시나 운이 좋았는지 지하철에 타자마자 빈자리가 생겼다. 역시나 나이가 있어서 인지 이제는 지하철에서 서 있는 것 보다 앉아 있는 게 훨씬 좋다. 지하철의 모든 다른 이들처럼 스마트 폰을 꺼내어 연구년으로 이탈리아 피렌체 머무르고 계시는 학과 교수님께 온 이메일에 답장을 한 후 베낭 안에서 요즘 읽고 있는 소설책 한 권을 꺼냈다.
2004년에 출간되었으니 나온 지 꽤 된 소설인데 최근에서야 한국에서 출판되었기에 냉큼 주문해서 읽고 있다. 두께가 꽤 얇아서 마음 먹고 조용한 부암동 카페에 앉아 읽기 시작하면 반나절도 안되어 읽기에 충분한 분량인데 요즈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지하철 안이나 가끔 조교들이 모두 퇴근한 학부장실에서 음악 들으며 천천히 한줄 한줄 음미하며 읽고 있다.
소설 속엔 시니컬하고 조용하지만 유쾌한 생각을 할 줄 아는 자신보다 훨씬 예쁜 언니가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 모자를 쓴 여자 주인공과 외동아들이면서 밴드에서 트럼본을 연주하는 법대 학생이 등장한다. 한참 둘이서 심야카페에서 재미난 대화를 하는 부분을 읽고 있었던 중.
늘 그렇든 건대입구 역 근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린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찌른다. 내가 대답이 없자 마른 겨울날 앙상한 가지처럼 길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누군가 다시 날 쿡 하고 찌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커다란 검은색 얇은 안경을 끼고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은 채 한쪽에 길다란 캠버스 천으로 된 숄더백을 오른쪽 어깨에 맨 여자가 날 보고 있다. 대학생은 아니고 그렇다고 직장인이라고도 볼 수 없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아이다. 아니 여자사람이다. 쌍커풀은 왼쪽에만 진하게 있고 오른쪽은 수학을 포기한 고2 학생들의 ‘수학정석’ 처럼 앞 부분만 진하게 자리를 잡은 채 흔적만 보일 뿐 양쪽이 비대칭적이다. 그래서인지 여자 아이 자체도 모든 게 꽤 비대칭적으로 보인다. 한쪽 어깨에 맨 숄더백도 그렇고 고개도 약간 한쪽으로 기울인 채.
여자아이 아니 여자사람이 말을 건다. “어… 죄송한데. 하루키 읽고 계시나봐요?” 귀에서 이어폰을 뺀 체 난… “어…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하루키 소설을 읽고 있는 걸 알리는 없다. 그저 무릎 위에 회색 빛 베낭이 올려져 있고 다시 그 베낭 위에 책이 올려져 있기에 책 제목 뿐 아니라 당연히 저자를 짐작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지하철 안에서 다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미소를 지은 채 책을 읽는 사람이 보이길래 저도 심심하던 차에 앞에 서서 같이 책에 있는 문장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평소 좋아하던 하루키랑 같은 문장 스타일이지 뭐에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하루키 새 소설이 나왔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그러고 주위를 둘러보니 지하철 안에는 커다란 목소리로 누군가와 아파트 재건축 정보에 관련하여 통화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와 조용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네. 나온 지는 어느 정도 된 하루키 소설인데 올해에 한국에 번역이 되어 나왔더라구요. 장편이라기보다는 긴 단편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뭐 그 말이 그 말 같기도 하지만요. 천천히 걸으며 물 자주 마시기나 물 자주 마시며 천천히 걷기 처럼요. ‘애프터 다크’라는 책 제목처럼 어느 새벽녘 일본의 거리가 배경이구요. 근데 꽤 재미있네요. 한번 읽어보세요. 전 하루키는 소설을 포함해서 수필, 여행기 등 다 읽었는데 이번 책도 꽤 근사한 것 같아요. 근데 하퀴 소설은 확실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아요. 재미난 문장도 많구요. 특히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살아가는데 그 기억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타면 아무 차이도 없다는 대목이 참 좋더라구요.”
난 뭐에 홀린 듯 바보처럼 그녀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고 있었다. 아마 기이한 이 상황 탓에 내 몸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렇군요. 아 근데 저 이제 내려야겠네요. 꼭 사서 읽어 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남들보다 반음쯤 높은 목소리에 인사를 꾸벅 하고 그 여자아이는 총총걸음으로 ‘신반포’역에서 내려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에게 꼭 말을 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그저 그 지하철 그 칸에 내가 있었을 뿐이다. 사라진 그녀의 뒤로 그녀의 하얀 손가락과 가녀린 발목과 좌우로 찰랑거리는 포니 테일 머리가 흔적처럼 길다랗게 자리 잡으며 차츰 작아져 하나의 점이 되더니 이윽고 소멸되었다.
그 여자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다시 ‘애프터 다크’ 소설로 눈을 돌렸는데 이상하게 방금 그 여자아이가 소설 속 주인공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현실인지 소설인지 분간이 안되며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난 내가 내려야 할 역을 이미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주말 날씨가 너~~~무 좋은데 본의 아니게 내내 집에만 있었더니 정신이 나가서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번 해 봤습니다. ㅎㅎㅎ 위의 이야기 중 진짜는 사진에 첨부된 저의 새로 산 스니커즈, 요즘 진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애프터 다크’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다 전혀 없었던 일입니다. 가을이니 이해하셔요. ^^"